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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설교(3)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교회
기사입력 2017.01.1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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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교회 ]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 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 (갈라디아서 5:19-26)
사람은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긍지가 무너지면 산다는 그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마련입니다. 군인은 군인으로서 긍지를 지녀야 하고, 교사나 교수는 교사와 교수로서의 자기 직업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의사는 의사로서의 긍지가 있어야 되고 간호사는 간호사로서 긍지가 있어야 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 나름대로 긍지가 있어야 하고 실패한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실직자들도 나름대로의 긍지를 가지고 있어야 다시 재기 할 수 있습니다. 긍지를 잃게 되면 사람은 추해집니다. 긍지를 잃어버리면 다시 재기하기 어렵고 삶에 대한 역동성을 체험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인은 교인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교인이 교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어버린다면 그 신앙생활은 메마른 신앙생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긍지는 본인 자신의 노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상황적 존재이기 때문에 주변 상황이 어떻냐에 따라서 긍지가 생기기도하고 잃기도 합니다. 아무리 교사나 교수가 긍지를 가지려고 해도 학교 상황이나 교육현장이 삭막하고 열악하다면 교사나 교수로서 긍지를 갖기가 어렵게 됩니다. 교인들이 긍지를 가지고 살고 싶어도 그 교회가 교인들에게 긍지를 심어주지 못한다면 그 교인은 긍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리 원하고 계시고 저도 그렇게 원하고 있고, 여러분들도 그리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부활교회는 부활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모든 교인들에게 긍지를 심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교인들이 부활교회교인이라는 이 긍지를 가슴에 담을 때 신앙생활이 바로 되고, 즐겁게 됩니다. 또 신앙생활이 그렇게 바로 되고 즐겁게 되므로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도 모두 바로 되고 즐겁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8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모든 기초를 다 갖추었습니다. 이제 우리 부활교회가 해야 할 일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교인들에게 긍지를 심어 주는 일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교회가 교인들에게 긍지를 심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교회가 교인들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는 교회가 되므로 긍지를 심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령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살자’,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자’, ‘성령의 역사속에서 놀라운 힘을 발휘하자’ 이렇게 성령에 대한 말을 끝없이 반복하며 외칩니다. 그러나 막상 ‘성령이 어떤 존재냐?’ 라고 물으면 체계적으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말은 숱하게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6월은 성령강림절이 있는 특별한 달입니다. 성령강림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곁에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성경을 보면 성령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르침들이 많지만 가장 기초적인 것은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신비하고 놀라운 힘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구약성경에는 이 성령을, ‘바람’에 많이 비유했습니다. ‘바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태풍을 생각해 보십시오. 태풍이 불어 몰아치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까? 성령은 바로 신비한 존재요, 신비한 힘의 근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성경은 이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불에 비유했습니다. 여러분 불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은 우리에게 친숙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불이 어떤 것인지 생활을 통해서 이미 체험했습니다. 불이 나면 얼마나 대단한 파괴력을 갖습니까? 불은 주변에 모든 것을 완전히 태워서 재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이렇게 불과 같습니다. 대단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고 대단한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기에 사도행전은 성령을 불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그 자체가 신비한 힘이요 그 신비한 힘의 근원적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자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죄인인 우리들을 구속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참으로 많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보면 성령은 전도하게 만든다고 말씀합니다. 전도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을 영접한사람, 성령을 체험한 사람은 전도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증거 하지 못하는 자는 성령을 충만히 영접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나아가서 직장생활을 하건, 사업을 하건, 무엇을 하든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당당히 밝히지 못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말 한마디를 못한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영접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도하십시오. 그러니 어딜 가도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십시오. 그것이 성령을 영접한 자의 당당한 모습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령의 은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교회를 섬기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려면 성령을 영접해야 합니다. 성령을 체험해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성령을 영접한 사람이고, 성령을 체험한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식당에 가서 설거지하는 것 쉬운 것이 아닙니다. 토요일에 나와서 교회를 청소하는 것, 교사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찬양대원이 되어서 봉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수위원이 되어서 거룩한 헌금을 계수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의 경험과 사람의 지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을 영접하고 성령을 체험해서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해야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교회봉사도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봉사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생각대로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막연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판단과 통찰을 자기 임의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성령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데 내 힘으로 섬기는 데야 성령을 영접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내 고집대로 섬기는데 성령의 능력을 빌릴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내 마음대로 교회를 섬기는 데 성령의 신비한 힘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 고집대로, 내 기분대로, 내키는 대로 섬기면 되는 것이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던져 버리면 그만입니다. 아주 쉽습니다. 그런데 정말 던지고 싶어도 끌어안고, 하기 싫어도 해야하고, 힘들어도 짊어져야 하고, 이건 사람의 어떤 능력과 판단과 고집과 깨달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격려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셔야 교회를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을 보면 ‘성령의 열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를 심으면 사과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배나무를 심으면 배가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면 성령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아홉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제가 본문 갈라디아서 5장 2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아홉 가지입니다. 이 중에 쉬운 것이 있습니까? 하나도 쉬운 것이 없습니다. 오래 참는 것이 쉽습니까? 절제하는 것이 쉽습니까? 끝까지 남을 섬기는 이 충성이라고 하는 것이 쉽습니까?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기쁘게 사는 희락이 쉽습니까? 이웃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돈 버는 것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직장에 가서 일하고 직장을 얻을 수 없다면 일용직이라도 그 힘든 것까지라도 열심히 한다면 돈은 먹을 만큼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서야 하고 성령께서 격려해 주셔야 되고 성령께서 위로해 주셔야 이 아홉 가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 이웃과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한 마디로 말하면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하고, 잘 하게 하는 모든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다른 말로 인격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 삶에서 인격이라는 말이 사라진지 벌써 오래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인격이라고 하는 말을 저 박물관에 보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인격이라고 하는 말을 별로 쓰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인격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인격이라고 하는 말이 좀 세속적인 냄새가 난다면 말을 고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이것이 바로 인격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목적을 잘 먹고, 잘 사는데 두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어도 잘 먹지 못하고, 잘 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근본 목적을 천당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당 가는 것이 뭐 그리 대수입니까? 천당 가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서울역에 가서 부산가는 새마을열차를 타면 시간이 지나서 저절로 부산역에 도착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몇 시에 도착하느냐, 가다가 사고가 날것이냐, 안 날것이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마을열차에 몸을 싣고 신문도 좀 읽어보고, 커피도 마시고 6월의 신록도 감상하고, 옛날의 추억도 감상하면서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내다가 때가 되면 부산역에 도착하는 그런 여행을 해야 합니다. 열차에 타서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모두 다 천당에 갑니다. 내 힘으로는 천당에 갈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얼마든지 편안하게 쉽게 천당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에 천국 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오늘의 삶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 이것이 신앙의 문제입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이것은 거룩한 노력입니다. 신비한 노력입니다. 아름다운 노력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지난번 통계청에서 아주 쓰라린 통계 결과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통계청에서 지난 10년 동안 한국 종교의 흐름을 조사했는데, 10년 동안 불교신자의 수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10년 전이나 10년 후인 지금이나 거의 비슷합니다. 대략 천이백만 명 정도입니다. 천주교 신도의 수는10년 동안 50%가 성장했습니다. 놀랍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10년 동안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1.6%가줄었습니다. 왜 기독교 교인이 이렇게 줄어듭니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가르쳤는데 이제 웬만큼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질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고 늘 교인들끼리 싸우고, 교회에 분파가 생기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답게 살지 못하니까 세상에 대한 영향력들이 떨어졌습니다. 이런 것은 목사들이 통렬하게 회개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가르쳤고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가르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인격과 자질을 갖추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빛이 되는 일을 못했습니다. 소금의 노릇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점점 기독교 교인의 수가 감소하게 되고, 교회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본질은 현실입니다. 환상과 꿈이 아닙니다. 천국이 아닙니다. 죽어서 가는 저 세상이 아니라 살아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바로하지 못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들은 누구입니까? 첫째는 가족입니다. 가족들끼리 서로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무슨 신앙생활을 한다고 떠벌릴 수 있습니까? 직장에 나가서 상사와 늘 불화하고, 또는 아랫사람들을 늘 고통스럽게 만들고, 동료들을 시기하고 분쟁과 질투만을 일삼으면서 직장생활하는 사람을 어찌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인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감싸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약점을 들추고 서로를 비방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어찌 성령의 열매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다음 세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바른 관계’입니다. 바른 관계는 책임에 충실한 것입니다. 여기 자매님들이 많이 계시는데 남편한테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느냐고 덤벼들기 전에 아내로서 책임을 먼저다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관계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런 책임에 대한 바른 관계를 생각하기 보다는 왜 나한테 잘 해주지 않느냐, 왜 나만 사랑하지 않느냐며 시비하려고 하니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두 번째 관계는 좋은 관계입니다. 좋은 관계가 무엇이냐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독점은 죄악이고 독점 그 자체는 부패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권력의 독점은 문제가 큽니다. 모든 것을 적절하게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려고 해야 합니다. 나누어 주어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면서 좋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주변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려고 할 때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웃과의 ‘즐거운 관계’입니다. 즐거운 관계라는 것은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감정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가 슬프면 나도 슬프고 그가 기쁘면 나도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이웃과의 관계가 바른 관계에서 좋은 관계로 즐거운 관계로 가면 이웃과의 모든관계가 아주 원만해지고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이유는 참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겠지만 동시에 그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부부는 함께 삽니다. 부모 자식은 함께 살아야 됩니다. 사장과 노동자는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의사와 환자는 함께 살아야 됩니다. 소비자와 생산자는 함께 살아야 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살아야 합니다. 너와 내가 함께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끼리 싸우고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이 서로 시기하고,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이 서로 증오한다면 그런 인생이 어떻게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부부사이가 원만하지 못한 분들에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집니다. 부부사이가 원만하지 않고, 좋지 않다면 이혼하십시오.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이혼하기가 쉽습니까? 힘 드는 일입니다. 재산도 나눠야 하고, 자식도 신경이 쓰이고, 또 이혼했다고 더 좋은 남자, 더 좋은 여자 만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인간은 다 고만고만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체념해야 합니다. 체념은 아름답습니다. 체념하고 다시 시작해서 잘하자.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부부가 평생을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아홉까지 열매를 맺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긍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남을 비판하고 남을 비난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남을 비난하고, 욕하고,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소리소리 지르면 마음이 시원해집니까? 물론 그런 경험을 해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실컷 욕을 하니까 스트레스가 싹없어졌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인격이 제대로 된 사람은 남을 욕하고 비난했다가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자람을 통회하고 애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됨으로 인해서 우리는 자존과 긍지를 되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조금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고 오랫동안 신앙생활 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래도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에 한두 가지라도 맺었으니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자긍심도 생길 것입니다.
우리 부활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는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가르쳐 주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부활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게끔 도와주고 격려하고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부활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우리 부활교회를 통해 교인들이 어떻게 자라나야 합니까? 돈 많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조금씩이라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가르치고, 특별한 프로그램을 하고, 교인들끼리 모여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자고 서로 어깨를 끌어안고 기도하는 교회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여러분에게 ‘종교를 가졌느냐’라고 묻거든 당당하게 ‘나는 기독교 신자입니다.’라고,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씀하십시오. 그들은 또 물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 그렇게 묻거든 ‘나는 부활교회에 다닙니다.’ 라고 당당히 말씀하십시오. 또 그들이 ‘그렇다면 부활교회는 뭐하는 교회냐?’ 그렇게 묻거든, 쓸데없는 얘기는 다 거두시고 ‘우리부활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게 가르치고, 도와주고, 위로하고, 격려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는 교회입니다.’ 라고 말씀하십시오. 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 만족해하십니다. 그 때 성령께서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힘과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교회정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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